의대 자퇴생 공대 휴학생

소심한 제인 오스틴*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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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를 자퇴하고 전자공학과에 신입학한지도 1년이 지났네요
제 나이는 벌써 29을 바라봅니다. 다른 분들은 석박하고 계실 나이이겠지요
학창시절, 너는 공부말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부모님 말씀과 전교 1등을 못하면 날라오는 폭력 폭언에, 말 그대로 공부만 해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저는 피와 내장을 보면 숨을 못쉬는 나약한 인간이란걸 예과 2학년 카데바 실습할 때야 알게되었습니다
휴,복학을 반복하고 부모님을 힘들게 설득해서 자퇴했었지요
공부말곤 할 줄 아는게 없었는데 이마저도 내 길이 아니라 하니..ㅎ
바로 도피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때마침 코로나 발발, 백신도 못맞는 몸이라 유학 비자 발급도 안 됐습니다ㅎㅎ
그렇게 2년인가 3년을 집에 박혀만 있었어요 그래도 늘 해보고 싶었던 일본어 공부는 원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ㅎㅎㅎ

언제까지 시간을 버리며 살거냐, 대학은 졸업해야하지 않겠냐는 어머님 말씀에, 수능 원서 접수 마감 직전에 접수하고 부랴부랴 공부해서 대학에 왔습니다
과는 전자공학과. 이유는 없었어요, 뭘 하고싶은지 왜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아버님이 전자공학과 교수님이라 선택했어요
아버님이 계신 대학을 갔으면 좋았겠지만 수능 성적이 모자라서 낮은 대학을 왔습니다
부끄러운 새끼라던 아버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네요
그래도 1년동안 행복했습니다. 캠퍼스라함은 좁디좁은 메디컬 캠퍼스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제게, 넓은 캠퍼스와 자유로운 학생들의 모습은 감동이었지요

얼마전 제 지도교수님과 면담이 있었습니다. 제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시며 '넌 뭘하고싶니?'라고 물으셨죠.
말문이 막혀 어린 시절 (아마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 로봇 이야기를 겨우 꺼냈어요. 교수님은 저를 지그시 바라보시며
'넌 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니?' 라고 물으셨는데, 그 질문에는 겨우겨우 꺼낼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친한 동생이랑 저녁을 먹었는데, 이 동생은 컴퓨터공학과를 다닙니다. 코딩을 아주 잘해요. 멋있는 녀석입니다.
동생에게 '넌 언제부터 코딩했어? 왜 코딩이 좋아?'라고 물었더니 '초등학생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어서 게임을 만들어 보고싶었어'라더군요

동생과 헤어지고 캠퍼스를 빙글빙글 돌다가 기어코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한심스럽게도 아버님을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어린시절 뭔가 해볼 기회가 있었다면, 친구들이랑 뛰어놀 기회가 있었다면, 아버님께 반항하고 얻어맞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었을까 너무 궁금하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형편없는 20대 후반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요
대학을 다니는 1년동안 죽고싶은 마음이 치솟을 때마다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젠 알 것도 같습니다

이번 학기를 마치면 다음 한 학기는 휴학할 생각입니다. 집과 학교를 벗어나 무언가를 경험할 기회를 저에게도 주고싶어서요
부모님을 계속 원망하기엔 그 분들은 이미 늙어버리셔서, 제가 이젠 저의 부모가 되어주는 수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휴학 이후의 저는 뭔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을까요? 하고싶은 일이 생긴 사람의 얼굴을 하고있을까요?
이젠 다 제게 달린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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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개

2023.12.01

글만 읽어도 먹먹하네요.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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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좋아하는 것이나 꿈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도 또래에 비해 졸업도 많이 늦고 방향성도 뚜렷하지 않아서 요즘 방황을 조금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앞으로 살아갈 날 중 지금이 제일 어릴 때라는 생각에 뭐든 해봐야지 다짐하고 있어요.
의대 자퇴하셨다 했는데, 글쎄요.. 그것도 제가 생각하기엔 용기이자 도전이 아니셨을까 싶네요.
같이 파이팅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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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2

큰결심하느라 고생하셨고 이제는 부모님의 꼭두각시가 아닌 본인을 위해 인생을 살면 됩니다. 그게 꼭 공부가 될 필요도 없구요. 파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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